“평균수명을 생각하면 이제 인생 중반입니다. 젊은 사람보다 빠를 수는 없겠지만 마음만 젊다면 불가능한 일은 없습니다.”

긴급조치9호에 반대하며 유신정권 타도를 외치던 22세의 청년은 수감생활을 마치고 보일러공이 됐고 또 긴 세월을 넘어 사법시험 최고령 합격자로 돌아왔다. 53회 사법시험 합격의 꿈을 이룬 주인공 오세범씨는 올해로 56세다.
“직장을 다니다가 41살의 나이에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스스로의 부족함을 느끼고 재충전이 필요한 때라는 생각이 들어서 5년 안 합격을 목표로 시작했는데 10년을 더 했네요.(웃음)”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인 오씨는 서울대 언어학과 74학번으로 소위 말하는 운동권의 길로 접어들면서, 사회생활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평탄하지 않았다. 1977년 3월 28일 서울대 일부 학생들은 유신정권 타도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고, 이는 4월 11일 2차 시위로 이어지는데 이때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이 오씨다.

오씨는 이 시위로 징역2년을 받고 옥중에서 유신철폐를 선동했다고 해서 추가로 징역 2년형을 더 받았다. 1979년 8.15 특사로 풀려나게 되지만 독재에 반대하는 그의 활동은 계속됐고 다시 수배를 받다가 또 1년 반가량 옥살이를 하게 되고 마침내 1981년 8.15 특사로 풀려났다.

“보일러기술을 배워 보일러공으로 3년 정도 회사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민주화열기 속에 1987년 회사에 노동조합을 만들다가 해고됐고 이후 해고무효소송 등을 하면서 또 2년여를 보냈네요.”

소송은 그의 패배로 끝났지만 이 와중에 인권변호사인 김칠중 변호사를 만나게 되고 그 인연으로 오씨는 법무법인 다산의 상담실장으로 3년간 근무하게 된다. 이후 내일신문이 창간하면서 업무기획실장으로 일하던 그는 회사가 궤도에 오르면서 새로운 꿈을 품게 된다.

“사람들 간의 갈등을 조정하고 중재하는 일이 저한테 잘 맞았습니다. ‘내가 변호사 하면 잘 할 수 있을텐데’라는 생각이 들었죠. 원래 학자의 꿈을 꾸던 제가 시대적 상황을 외면할 수 없어 많이 늦었지만, 지적 충적 욕구가 계속 남아있었고 지금보다 더 늦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에 결심이 섰습니다.”

1997년부터 시작된 15년 고시생 생활을 버틸 수 있게 한 것은 가족, 특히 아내다.
“학습지 교사를 하면서 가장 노릇을 한 아내한테 미안하죠. 생계를 위해서 제가 중간에 3년 정도 다시 법무법인 상담실장 일을 하기도 했고.... 엄마가 고생하는 것을 보면서 두 딸이 사춘기때 저를 원망도 했겠지만 언제나 친구처럼 함께 했고, 고시공부를 하다보니 다른 사람은 잘 못 만나게 돼 오히려 가족관계는 돈독해지더라구요.(웃음)”

‘만학도’ 아버지가 항상 공부하는 모습을 지켜본 덕인지 두 딸은 훌륭하게 성장해 현재 큰딸(26)은 의사, 둘째(25)는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육군소위로 근무하고 있다.

세상사에 관심이 많은 오씨는 앞으로 만나게 될 다양한 사건과 사람들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차 있다. “노동법이나 언론 쪽으로 더 공부하고 싶은 생각도 있고, 사회가 제게 무엇을 요구하는가를 더 찾아봐야지요. ‘지식은 사회적 산물’로 사회에 기여해야 하는 것이니까요.”

사법연수원 입학을 앞둔 그는 요즘 ‘컴맹’ 탈출을 위해 컴퓨터를 배우고 그간 못 읽었던 책도 보고 친구도 만나며 15년 만에 가장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먼 길을 돌아 또 하나의 성취를 해낸 그는 마지막으로 도전을 앞둔 이들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고 하잖아요. 공부를 하면서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다시 시작하는 마음만 있다면 나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방향만 제대로 잡았다면 중간에 새롭게 도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여러분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오연주 기자 @juhalo13>oh@heraldm.com>

Posted by 72thin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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